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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사랑의 배를 타고 그리움의 강을 건너 - 김종길 명예 교수의 고향 안동 지례마을
  • 글쓴이 : 고대TODAY
  • 조회 : 2679
  • 일 자 : 2012-10-21


안동

사랑의
배를 타고
그리움의
강을 건너


김종길 명예 교수의 고향
안동 지례마을


사라졌지만 잃지는 않았다. 임하댐 건설로 호수 속에 묻혀버린 안동군 임동면 지례마을. 대대로 살아온 그의 고향집은 진즉에 자취를 감췄지만, 스스로 살아남은 그의 추억은 그 자태가 아직 찬란하다. 툇마루에 쏟아지던 오후햇살을, 창호지문에 어리던 새벽달빛을, 앞마당에 흩날리던 매화꽃잎을 그는 여태 생생히 기억한다. 속절없이 사라져도 끄떡없이 남아있다. 한평생을 시인으로 살면, 그렇게 된다.
글. 박미경(자유기고가)

 

시인
김 종 길
1926년
경북 안동 생
1946년
고려대 영문학과 입학
1993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1955년
시 ‘성탄제’로 데뷔
2005년
이육사 시문학상
2007년
청마문학상
2004~2007
대한민국 예술원
부회장


그의 집은 어느덧 ‘그곳’을 닮아있다. 지은 지 37년이 된 수유리의 이층집. 나무 많은 앞마당은 온갖 꽃들이 앞다투어 피어나던 고향집의 뒤뜰을 닮았고, 책으로 둘러싸인 서재는 묵향이 진하게 배어있던 증조부의 사랑방을 닮았다. 그의 일과도 어느덧‘그때’를 닮아간다. 온종일 먹을 갈고 시를 지으며 ‘놀던’ 어린 날처럼, 그의 하루는 온통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으로 채워진다. 여든여섯 살에 그는 다시 ‘아이’가 되어있다.

 


1. 온종일 먹을 갈고 시를 지으며 놀던 어린 날처럼, 그의 하루는 온통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으로 채워진다. 여든 여섯 살에 그는 다시 ‘아이’가 되었다.

 


등단 65년의 현역시인

 

그의 이름은 몰라도 그의 시를 아는 사람은 꽤 많다.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린 그의 시 <성탄제> 덕분이다. ‘아버지의 서늘한 옷자락’이나 ‘그 붉은 산수유 열매’란 구절에 밑줄을 그어본 건 머리가 희끗해진 중년도 예외가 아니어서, 세대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로 그 시를 이용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등단한 지 올해로 65년이 된 그는 그러나 ‘교과서 안에만’ 존재하는 시인이 아니다. 지난 해 일곱 번째 시집 <그것들>을 펴내고 요즘도 틈틈이 시를 쓰는, 당당하고 팔팔한 ‘현역’이다.


“<그것들>은 <해거름 이삭줍기> 이후 3년 만에 펴낸 시집이에요. 돌아보니, 교수로 재직 중일 때보다 정년퇴임 이후에 오히려 더 많은 작품을 발표했더라고요. 초창기의 시들이 예술주의 시들이라면 요즘의 시는 인간주의 시들에 가까워요. 예술적 긴장감을 줄이고 인생을 얘기하기 시작하면서, 더 많은 작품을 쓰게 됐어요.”


신작 속엔 그의 ‘오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해외에 체류하는 손자 손녀들을 ‘그것들’이라 부르며 그리워하는 ‘할아버지’, 혹 아는 사람이 있을까 ‘부음란’을 꼼꼼히 챙겨 읽는 ‘노인’,여든을 넘기고도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아이’…. 그 나이를 살아보지 않았거나 그 경험을 갖지 못했어도, 콧날이 시큰하거나 명치끝이 아파져 온다. 제 아무리 팍팍한 가슴이라도, 그의 시 앞에선 촉촉해지지 않을 재간이 없다.

 

세어른의 사랑으로 기억 되는 어린 날의 고향

 

그는 이른바 ‘절제’의 시인이다. 간결하게 농축된 시어만을 선보여온 사람답게, 그 어떤 말도 결코 장황하게 늘어놓는 법이 없다. 그런 그가 비교적 말을 길게 하는 순간이 있으니, 고향에서 보낸 어린시절을 이야기할 때다. 그의 시어가 어느 ‘샘’에서 길어 올려지는지 어렵지 않게 알아낸 셈이다.


“내 고향 지례마을은 의성 김씨 집성촌이에요. 유림들의 마을이죠. 큰할아버지(증조부)의 사랑방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낸 나는 일찌감치 글을 읽고 시를 지을 줄 알았어요. 아마 네 살때였을 거예요. 제사를 마친 큰할아버지가 일찍 잠든 나를 위해 송편 두 개를 사랑방 윗목에 놔두셨는데, 이튿날 그걸 먹고 이런 한시를 지었던 게 기억이 나요. 오늘 아침에 달을 두 개 먹으니 뱃속에 광명이 가득하다, 이런 내용이었죠. 그게 내 인생의 첫 시였어요.”

두 돌 반 만에 어머니를 여읜 그는 가슴 따뜻한 증조부와 증조모, 일찌감치 홀로 된 조모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 어머니 한 분을 잃은 대신 ‘세 분의 어머니’를 얻은 셈인데, 그분들의 정성이 참으로 지극했다. 두 달 내리 폐렴을 앓던 어느 날의 풍경이 그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방바닥에 내려놓기만 하면 하도 울어대서 두 할머니는 번갈아가며 그를 업어줬다. 밤은 그렇게 깊어갔고 잠결에 살짝 눈을 뜬 그는 등에 자신을 업은 채 할머니가 방에 엎드려 졸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아픈 손자 때문에 차마 눕지는 못하고 희미한 등잔불 아래서 꾸벅꾸벅 졸던 할머니. 겨우 네 살이었는데도, 그 날의 그 풍경은 그의 기억 속에 화인처럼 남아있다.

“나는 우리 집안에서 신학문을 익힌 최초의 사람이에요. 보통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아홉 살에 온 가족이 청송군 진보로 이사를 갔어요. 고향에서 생활한 게 십년이 채 안 되는데도, 창호지문에 비치던 달빛이며 앞뜰에 흩날리던 매화꽃 같은 게 지금도 선명해요. 사랑방 툇마루에서 바라보던 산봉우리나 물웅덩이 속에 들어있던 저녁별 같은 것도요. 시인이 될 수 있었던건 전적으로 그 때의 기억들 덕분이에요.”

시인 이외의 삶을 꿈꿔본 적도, 시인이 된 것을 후회해 본 적도 그는 없다. 그 ‘밋밋한’ 인생이 불현듯 찬란해 보인다.

 

상실의 늪에서도 꽃은 피어나고

 

그를 ‘시인으로 만든’ 고향마을은 89년 임하댐 건설과 함께 호수 안에 묻혔다. 그의 상실감이 얼마나 깊었는지는 그의 시 속에 종종 드러난다. 그 가운데 <달맞이꽃>은 처연하게 아름다운‘상실’의 시다. 사람들은 떠나고 달맞이꽃만 환하게 피어있던 수몰마을의 슬픔이 행간마다 절절히 표현돼 있다. 특히 ‘산을 깎은 흙빛이 눈에 쓰리다’는 표현은, 그 산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의 마음까지 아프게 한다.

“<유해>란 시는 수몰 직전, 내가 나고 자란 집을 해체해서 마당에 쌓아둔 걸 보고 쓴 시예요. 서까래며 들보, 기둥 같은 재목들을 우리 집 백년의 애환을 지켜본 증인들로 묘사했죠. 유해가 돼버린 증인들을 보면서 가슴이 얼마나 먹먹했는지 몰라요.”


3. 4. 5. 지례마을은 의성 김씨 집성촌으로 임하댐 건설로 호수 속에 묻혔다. 고향에서 생활한 것이 10년이 채 안 되지만 그는 아직도 창호지 문에 비치던 달빛이며 앞뜰에 흩날리던 매화꽃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1. 2. 마을이 수몰 위기에 놓이자 뒷산으로 옮겨지은 것이 지촌 김방걸의 집. 그의 고향 마을에 남은 유일한 고택으로 지금은 지례예술촌으로 조성돼 관광객들의 발길로 북적인다.

 


3. 고향에 대한 기억을 즐겁게 풀어 놓고 있는 김종길 시인

4. 지례예술촌에서는 한국의 은행나무 중 가장 굵은 줄기를 가지고 있다는 용계은행나무를 만날 수 있다. 다리 끝으로 보이는 나무가 바로 용계은행나무다.

 

 

이튿날 아침. 상실의 아픔이 스민 시인의 고향을 찾아가본다. 그와 함께여도 좋았겠지만, 시인의 이야기를 더듬으며 느릿느릿 공간을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지례마을은 골이 꽤 깊다. 첩첩의 산을 바라보며 굽이굽이 돌고 또 돌아도, 마을은 머리카락 한 올 쉬이 보여주지 않는다. 길을 잘못 든 건 아닐까 싶어질 때 ‘그 집’은 돌연 얼굴을 내민다. 마을이 수몰위기에 놓이자, 뒷산으로 200m쯤 옮겨 지은 지촌 김방걸의 집. 지례예술촌이라 불리는 이곳이 그의 고향마을에 남은 유일한 고택이다. 볕 좋은 오후 대청으로 반사되는 빛 한 줌의 고고함이나 비 오는 아침 처마 밑을 흐르는 빗방울의 도도함은 한옥에서만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아름다움이다. 열어놓은 문 사이로 뒤꼍의 바람과 앞마당의 바람이 자유로이 드나들고, 창호지 바른 살문으로 은은한 달빛이 밤새도록 들이치는 집. 이 집엘 와보니, 그가 ‘어떤 집’에서 유년을 보냈을지 어렵잖게 짐작이 간다.


‘그를 기억하고 있을’ 오래된 소나무를 지나, 그의 고향집을 삼켜버린 임하호 쪽으로 내려가본다. 오랜 가뭄으로 군데군데 바닥을 드러낸 호수. 만날 수 없을 줄 알았던 옛 집터가 드문드문 눈에 띄니, 반질반질 윤이 나게 장독을 닦는 그의 두 할머니와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붓글씨를 쓰는 그의 큰할아버지가 눈앞에 보일 듯하다. 저기, 먹과 벼루를 쥐고 놀던 ‘어린 김종길’이 사랑방 툇마루에서 해바라기를 한다. 괜찮은 시어라도 떠올린 걸까. 팔십 년의 세월을 건너온 ‘그 꼬마’가, 눈앞에서 환히 미소 짓는다.

 

성탄제

어두운 방안엔
빠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러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라곤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山茱萸)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血液)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고대TODAY 2012년 여름, 49호

 

커뮤니케이션팀
Tel: 02-3290-1063 E-mail: hongbo@korea.ac.kr 수정일자 : 2020-11-25